시월의 어느 평가결과를 앞에두고
'삑' 사원증을 찍고 게이트를 통과하고
커피를 한잔 들고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약속된 자기들의 자리에 앉아 지난밤 도착한 새로운 업무를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디 홀린 듯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아침을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회사의 디테일한 관리는
사람들이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선을 지키면서 우리를 구속한다.
그 선을 항상 팽팽하게 유지하는 것이 바로 이 회사가 자랑하는 관리의 XX이다.
본인 평가, 직원 간 평가, 상사 평가 등등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 간의 이러한 평가 제도는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면서 자칫 누군가의 나태함으로 헐렁해질 수도 있는 선을 계속 붙들고 있으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이다.
그리고 이름만 다를 뿐 평가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스트레스다.
다만 이러한 개인적인 평가는 외부로 오픈되지는 않기에
내 옆자리서 월급 루팡 하는 저 동료보다는 나의 평가가 더 좋겠지라는 자기 위안으로 삼키면 된다.
이에 반해 외부로 오픈이 되어 점수가 낱낱이 공개되는 평가가 하나 있다.
부서와 회사의 건강도를 측정하는 평가이다.
부서원들이 자신이 속해있는 회사에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부서장에게 불만은 없는지
부서가 본인의 성장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인사 평가는 공정하다고 느끼는지
우리 회사는 도덕적으로 깨끗해서 자랑스러운지
질문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읽다 보면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는 항목들로만 이루어진 평가다.
나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에 대한 평가이자
매 분기 최고 실적이라는 뉴스를 접하지만 직원들 성과급 앞에서는 항상 위기라고 회피하는 회사에 대한 평가인데
고운 말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수 년째 이어져 오는 이 평가의 결과는
학창 시절 수학 성적 마냥 모든 학업 능력을 대표하여 우수생과 열등생을 나누며
노력해도 오르기 쉽지 않아 좌절과 우울을 경험하게 하며
결과 발표 후 2주가량은 본인의 이름 대신에 점수로 불리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끔한다.
'이번에 저 부서 40점이잖아.'
'그래.. 그렇게 부서원들을 쥐어짜는 데 그럴 주 알았다.'
'쉿... 쉿 40점 지나간다.'
주변 동료들의 모든 대화가 이렇게 들리는 환청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게 낮은 점수의 원인은 부서가 아니라 회사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이 갑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 기회가 유일하다.
익명의 보호아래 그간 쌓인 불만을 쏟아 낸 정당한 권리 행사의 결과는
선량한 시민 부서장을 죽이고
마피아에게 농락당한 게임의 결과를 가져왔다.
다음 마피아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선량한 시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을' 들은
'갑'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줘서 '을'의 시민 한 명을 지켜냈다.
그 결과는 선량한 시민 한 명을 살렸지만
마피아에게도 '훌륭한 갑, 최고의 갑'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관리의 회사는
이렇게 또 관리의 묘미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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