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

2024. 8. 25. 11:41

거짓말!!
겨우 참았다.
삼 십 대 초반의 젊은 여성분이었다.
지금 나의 맞은편에 앉아서 끝나지 않을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와 같은 회사 직원이다.
하는 업무는 다르지만 임직원이라는 공통분모는 말을 가려서 하게 했고,전혀 공감가지 않는 그 사람의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의 집중을 하게 했다.
2달 전쯤,센터를 통해서 휴대폰 잠금이 갑자기 걸렸다는 고객의 로그가 하나 전달이 되었다.
본인은 잠금을 설정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비밀번호가 맞지 않다고 나오고 잠금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 함께 전달된 이슈의 내용이었다.
잠금 이슈는 항상 긴장하게 한다.
SW문제이든 고객의 망각이든 잠금을 못 풀면 단말의 데이터는 복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경험하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미칠 일이 분명하다는 공감 때문에 항상 긴장을 하면서 로그를 확인한다.
'에잇.. 뭐야..'
'바꿨네..'
비밀번호는 최근 변경 이력이 있었다.
본인은 휴대폰 비밀번호를 변경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변경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비밀번호 변경만큼은 초 단위로 로그를 남기고 어떤 화면을 거쳐서 변경이 되었는 지까지 로그로 남기고 있다.
휴.. 그래도버그가 아니니 전후 사정을 잘 설명해서 기억만 잘 상기되도록 한다면
비밀번호를 기억해 내고 데이터도 다시 복구할 수 있겠다 싶어 안도의 한숨으로 로그 분석 내용과 함께 회신을 했다.
그다음 고객 대응은 서비스 센터의 영역인지라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사내 게시판에 장문의 불만 글이 올라왔다.

자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비밀번호만 사용을 해왔다.

어느 날 갑자기 잠금 화면이 풀리지 않았다.
서비스센터에 갔더니 내가 변경했다고만 하더라.
나의 데이터는 복구할 방법이 없고 초기화를 해야 된다고 한다.
나는 억울하다.

 
그 억울함은 분노의 필체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내 게시판을 모니터링하는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이 임직원 휴대폰을 빌려줄 테니 분석을 해달란다.
최근 불거진 중소기업대표 이슈로 인해 개발실은 잠금이 풀리지 않는 이슈들을 모두 전수 조사하고 있었고, 우리가 미쳐 놓친 SW 버그가 있는지를 리뷰하는 중이었다.
해당 임직원이 사내 게시판에 올린 글은 금방 사람들의 공감대를 받아서 너도 나도 안타깝다. 요즘 SW품질 왜 이러냐 등 근거 없는 비방이 달리고 있었기에
나 역시 최대한 빨리 휴대폰을 받아서 분석을 하고 싶었다.
어렵사리 확보한 휴대폰이 내 손에 도착했다.
품질, 검증, 다른 개발 부서 담당자들까지 연락이 온다.
'분석은 끝이 났습니까? 특이사항은 없던가요?' 그만큼 모두들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상황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로그를 살폈다.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이다.
지난번에 CS를 통해서 들어왔던 그 로그와 동일했다.
같은 사람이었다.
한껏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면서 짜증이 그 빈 공간을 채웠다.
"뭐야…"
본인의 망각을 SW 문제로 이슈화하고 다수로부터 비난을 받게 한 아주 괘씸한 경우인지라 사과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지. 본인이 변경을 하고도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밀번호가 변경된 그 시간대에 휴대폰으로 어떤 다른 일을 했는지, 무슨 게임을 했고 인스타는 몇 번 들어갔고, 그 뒤로 무엇을 했는지를 정리해서 기억을 살리기 위한 로그 분석을 진행했다.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같은 회사 사람이라는 조금의 인연이라는 배려였다.
로그 분석 결과에 대한 그분의 대답은 분석 내용이 틀렸다는 것이다.
여전히 본인은 비번 변경한 적이 없으며,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너무나도 비밀번호로 잠금 해제를 잘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개발팀 분석 내용을 전달하고 휴대폰을 돌려주러 간 다른 부서 사람이 전화가 왔다.
'임직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개발 분석이 잘못된 것 아닌가요?'
다들 그렇다.
단말에 남겨진 로그보다는 고객의 기억력을 신뢰한다.
'아닙니다.'
나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느껴졌는지 더하고 싶었던 의심은 접어둔 채
직접 임직원을 만나서 설명을 좀 더 해줄 수 있냐고 부탁을 한다.
부탁인지 자신의 부담을 자연스레 넘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이 참에 사과를 받고 싶어서 그러겠노라 약속을 했다.
 
막상 마주 앉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사과를 받는 건 과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말에 남겨진 로그와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고 마치 어제 일인 양 나에게 설명을 하는 그 사람을 지켜보며
나에게 분석을 의뢰한 휴대폰의 소유주가 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까지 생겼다.
기억의 왜곡을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이 사람은 영영 휴대폰의 버그로 인해 본인이 피해를 봤다는 생각을 각인하겠다 싶었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전혀 좁혀지지 않는 팽팽한 평행선은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원인이 무엇이건, 내가 생각하는 원인은 명확하지만, 그 사람은 휴대폰에 저장된 오랜 데이터를 살리지 못하게 된 안타까움이 있고 나는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일을 하느라 에너지를 쏟은 안타까움이 있다.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서로가 서로의 안타까움에 도움을 주지 못함에 미안해하는 척
실은 본인의 안타까움을 해결하지 못한 찜찜함을 가진 채.
나는 풀지 못한 이 안타까움을 대나무 숲에다가 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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