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기억법

2024. 10. 29. 12:32

"영기 엄마 있잖아
교대 나오고 그 집 아들이 정형외과 의사인데, 며느리도 의사고 어디서 병원 한다더라? 들어도 요즘 자꾸 까먹네, 그런데 그 친구가 이번 주말에 식사 같이 하자고 하는데.. 비가 온다고 하네"

"이모 딸 미숙이
왜 그 큰딸이 하버드 다니고, 둘째 아들이 서울대 들어갔잖아.
그런데 이번에 미숙이 신랑이 부산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데 이모들을 초대해서  한번 다녀올게"

나의 어머니는 당신의 지인을 소개할 때면 항상 그 지인의 가족, 친척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함께 덧붙이신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는 이런 식으로 한번 뵌 적도 없는 엄마 주변 사람들에 대해 익숙해져 갔다.

이러한 소개법이 이상하지 않냐고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와이프였다.
"어머님은 왜 본론과 상관없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하시는 거야?"

처음에는 이게 무슨 질문인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내게 어머니의 지인 소개법은 나 스스로 숟가락 들고 밥 먹기 시작할 때랑 그 세월이 같으니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근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근데 그 소개가 좀 잘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지 않아?"

"이렇게 성공한 사람이 내 친구다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거라는 거지?"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내는 분명 그렇게 느꼈겠지만 시어머니를 쉽게 속물로 치부하는 건 조심스러웠던지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그 소개법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했었던 것 같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은 일 잘해?라는 질문에
'아.. 그 친구 대전에서 데이터베이스 전공했는데 해병대 출신이래, ADD에서 인턴을 했다는데
아직 여자친구는 없나 봐.. 일? 일은 모르지...'라는 설명을 주절주절 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와이프의 질문은
지난 인생의 테이프를 빠른 배속으로 훑게 만들었다.
왜 그랬지?
어머니의 영향인가?
어떤 사람을 기억하는 나만의 방법인가?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의 학업 결과나 직업으로 기억을 하고 있을까?
SKY 나와서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가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알림으로 나도 덩달아 으쓱해지고 싶어서?
아무리 객관적으로 나의 맘을 찾아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나 스스로도 이러한 행동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 하지만 그 이후로는 나만의 기억법을 최대한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의식하며 지냈다.

"엄마 친구 영숙이
이화여대 나오고 남편이 교수하다가 이제 은퇴하고 나와서 집에만 있는데
그런데 영숙이가 어제 산에서 도토리를 많이 주웠는데 묵을 어떻게 만드냐고 연락이 왔더라."

오랜만에 듣게 된 익숙한 어머니의 화법은 묻어뒀던 나의 궁금증을 끄집어냈다.

"엄마. 엄마는 왜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의 서사를 다 엮어서 이야기를 시작해요?"
학교를 어디 나왔고 신랑이 누구고, 무슨 일을 하고, 아들은 뭘 하고 있으며... 이런 이야기들"

엄마는  당황한 듯 보였다.
당신 역시 한 번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을 테고, 이러한 질문도 처음 받아보셨을 거니.

"글쎄다..그 친구를 생각하면 그 친구 인생에서 가장 큰, 중요한 일들이 함께 생각이 나네.
엄마 고향 성주 촌에서 그 시절에 이화여대 가는게 어디 흔한 일이겠니
서울서 대학 다닌 친구 결혼을 하는데 남편이 교수라고 시골 동네가 떠들석 했거든
그러다보니 그 친구를 떠올리면 그런 기억들이 그냥 따라나오나보네
아들이 어느 대학 들어갔다더라, 취직은 어디 했다느니, 결혼은 누구랑 했는지
우리 나이되면 그런 것들이 큰 일이니까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학, 취업, 결혼, 그리고 출산 등등, 이렇게 이어지는 한 사람 인생의 소중한 행사를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성공한 지인을 통해 자존감을 올려보려는 게 아닌, 그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기억이 각인되어 있어 나오는 소개법이라는 생각이 드니 나는 무엇을 중요하다고 기억하고 있는지 곱씹어 보게 되었다.

학교, 직장, 결혼... 어머니의 그것과 크게 다른게 없긴 한데,
아.. 나에게는 군필 여부가 하나 더 있네.
특히 흔해빠진 육해공군이 아닌 해병대를 나왔다는 건 매우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고 있나보다. '그 친구 해병대 나왔대.' 라는 나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병무기록까지 덧붙이는 것을 보면...

그럼 여성을 기억하는 방법은 ?
그건 뭐 쉽다.
이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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