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낭 안녕..

2023. 2. 1. 17:22

담낭에 돌이 있다는 건강검진 결과를 처음 받은 게 십 년 전
그 후로 매년 그 돌의 개수는 늘어났고,
2년 전부터는 담낭 제거를 진지하게 권하기 시작했다.
작년 검진에서는 방치하면 암이..어쩌구 무서운 이야기까지 한다.
아...네네... 대충 답을 하며 배에 잔뜩 뭍은 젤을 닦아 내는 내게 한마디를 덧 붙인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수술해야 회복이 빠릅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약간 움찔했다.

소화력이 떨어지는 건 맞지만 평소에 통증도 없는데 수술을 해야 할까요?
네. 지금도 큰 역할을 못하고 있고 방치하면 나중에 더 골치 아파질 수 있고
담낭암은 예후도 안 좋아요 통상적으로.
쐐기였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병원 예약을 했다.
구멍을 한 개 뚫고도 처리할 수 있다는 병원이 요즘 꽤 핫해보였지만,
내가 비키니 입을 것도 아니고, 한 개보단 여러 군데 뚫어서 의사 친화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안전하겠지 싶어 3개 뚫는다는 의사를 선택했다.

예약을 하고 수술날이 다가올 수록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너무나 흔한 수술이라고는 하나...
"만약에"라는 거기에 내가 포함되면 어쩌지?
수술 중이라는 붉은 표시등을 보며 수술실 앞을 왔다 갔다, 초조하게 기다려봤던 몇 건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수술로 인해 받게 될, 그 정도를 알 수 없는 통증과 그것으로 인한 불안감보다는
지켜볼 가족들에 대한 걱정들로 마음이 착잡했다.

수술은 잘 끝이 났다.
마취 깨면서부터 강하게 전달된 통증은
무언가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걸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장 빨리 알려주는 신호였으리라.
수술 이틀째부터는 살만했다.
다만 몇 십년째 루틴이 되어버린 모닝커피, 카페인의 부재는 지독한 두통을 유발했다.
배의 뚫린 3방의 구멍 통증도 잊을 만큼 강한 두통은 진통제로도 막지 못하고
저녁 늦게 허용된 아메리카노 한모금이 온몸에 퍼질 때까지 날 힘들게 했다.

3일째.
흰죽이 허용되었다. 장기 하나가 없어져서 조금 걱정은 했지만 잘 넘어갔다.
그리고 모닝커피의 행복한 루틴을 다시 찾아왔다.
담낭이 제거됨에 함께 긴장해 쪼그라든 다른 장기들의 긴장 완화를 위해 복도를 계속 걸었다.
십 년째 걱정했던 담낭의 돌, 그것과의 자연스러운 안녕이 진행되고 있었다.

4일째.
밥이 허용되었다.
죽보다는 쉽지가 않았다. 장기가 격렬히 요동을 치고 거부감을 보였다.
원래 아침은 먹지 않았지..싶어 몇 술 뜨고 정리했다.
퇴원 준비를 했다.
퇴원 전 마지막 소독의 시간.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내 배를 쳐다봤다.
두 구멍은 스테이플러 3방, 오른쪽 옆구리 쪽은 스테이플러 2방으로 살을 잡고 있었다.
요즘은 실로 꿰매는게 아니라 스테이플러로 고정을 하나보다.
좀 섬뜩했다. 저 스테이플러 심은 어떻게 다시 뽑아내지?
제가 퇴원하고 조심할 음식이 있을까요?
아뇨.. 그냥 다 드시면 됩니다. 설사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적응하는 겁니다.
너무나 쿨한 의사의 마지막 멘트를 듣고 퇴원을 했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참 큰일을 겪은 너무나 긴 한 주였다.
하루하루 안부를 물어보는 이에 대한 고마움.
한 번 정도는 안부를 물어볼 법도 한데 연락 한통 없는 이에 대한 서운함.
이 나이 먹고도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다니....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내 몸에서 빠져버린 담낭의 크기 만큼,
딱 그만큼의 복잡한 감정들이 그 자리를 메꿔주고 있다.

'살아가는 모습 > 2023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즘.. 근황  (0) 2023.10.17
친구에 대한 생각  (0) 2023.02.06
사랑의 이해  (0) 2023.02.0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