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된 일상의 정의

2018. 10. 23. 06:40

출근길을 생각해보자.

차를 타면 의자가 이전 내 자세에 맞게 자동으로 움직여준다.

시동을 건다. BT가 연결이 되면서 이전에 들었던 미디어 관련 앱이 실행이 된다.

시끌벅쩍 입담 좋은 패널들이 진행하는 팟케스트가 나올 때면, 아~~어제 퇴근길에 내가 이걸 들었었지..

귀에는 익숙하나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요즘 친구들의 노래가 나올 때면,

어제는 무슨 생각으로 잘 듣지도 않던 월간 베스트를 리스트에 담아뒀을까 라며 기억을 더듬게 된다.

늘 듣던 그 음악들로 변경코자 뮤직앱을 실행해 보면,

나의 취향, 내가 에전에 좋아했던 가수, 최근에 좋아하는 가수, 그 가수들과 비슷한 가수, 방금 들은 노래와 유사한 장르,

2013년 10월 어느 날 많이 들었던 노래..등등

나와 관련된 정보로 만들어 낸 [나만의 노래]들이 서로 자기를 선택해달라고 둥둥 떠다닌다.

'오호~ 제법 똘똘한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나의 찌질한 음악 취향까지 하나 남김없이 다 공개되어 버렸구나' 라는 섬뜩함도 함께 든다.

유투브드 마찬가지다. 야릇한 제목에 눌러본 카톡 주작 대화 컨텐츠는,

이후 유튜브에 들어갈 때마다 더 야릇한 제목을 앞세워 나를 꼬득인다.

 

이렇게 노력들을 하고 있다.

자동차나 휴대폰이나 TV나...어떻게 하면 사용자의 선호도를 더 알아내고 그것에 딱 맞는 취향저격 컨텐츠를 제공할까?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게 할까?

 

내가 있는 부서에서도 요즘 이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

다들 거는 기대도 크고 상품화되었을 때 WOW!! 할 소비자의 반응을 기대하는 눈치이다.

이러한 서비스의 가장 큰 기술력은,

사용자의 패턴을 어떻게 잘 인지를 할 것인가?

그리고 정형화된 그 사용자의 패턴에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알아서 제공해 줄 것인가? 일 것이다.

밤 12시에 자고 아침 7시에 칼같이 일어나고, 아침 운동하고, 운동하면서는 신나는 음악, 헬스 어플로 방출된 칼로리 체크,

아침은 늘 커피로, 회사 시간은 9시부터 6시, 그 이후 월,수,금 학원을 가서 영어 공부를 2시간하고,

집에 돌아오면 9시, 샤워를 하고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독서를 하다가 12시에 잠이 든다.

이 얼마나 SW 개발자가 좋아할 만한 정형화된 삶인가. 이런 사람들만 생각하고 SW 초기 설계를 시작 하겠지.

정작 개발자 본인도 이렇게 살지 않으면서..

 

나는 이러한 패턴이 있는가?

SW개발자가 좋아할 삶인지,  일상 자체가 변수라서 나 때문에 예외 조건들을 덕지덕지 붙혀야 되는 삶인지.

나도 나름 패턴은 있다.

 6시 30분 기상, 비가 오지 않는다면 집 앞 공원에서 20분 산책

 7시 아침 밥 준비

 7시 30분 마눌님 출근, 아들 두 녀석 깨워 밥먹이기

 8시 10분 큰 아들 등교.

 8시 30분 카풀하는 동료에게 ㄱㄱ 라고 카톡 보내기

 8시 45분 카풀하는 동료 도착, 둘째 녀석 유치원에 데려다 줌

 8시 50분 회사로 출발

 9시 50분 회사 업무 시작

 12시 점심 시간, 밥 먹고 회사 한바퀴 돌고 들어와서 양치하면 딱 1시간 소요

 13시 오후 업무 시작

 18시 저녁 시간, Takeout 을 식당서 받아와서 먹으면서 업무 계속

 22시 퇴근 준비

 23시 집 도착 후 코잠들어 있는 아들 방문 열어보고 깨지 않을 정도의 스킨쉽 시도.깨려고 하면 재빨리 도망

 23시 30분 일단 TV 켠 후 샤워, 피곤한 날은 고양이 세수

 00시 심리적 허기짐인지 육체적 허기짐인지 판단해서 독서 또는 맥주를 취함

 01시 취침

 

이게 나의 일상이구나.. 하... 우울하다

다들 이렇게 사는건가. 이렇게 다들 빡빡한가 정말??

바쁘게 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바쁘게 산다고 다 잘 살고 있는건 아니지 않나..

가장으로 과장으로  어느 것 하나 구멍내서는 안된다는 강한 압박으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말 한마디가 듣고 싶다.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정말 열심히 살고 있으니 너무 자책하지마라고.

 

자.. 나의 패턴은 손수 친절히 알려줬다. 이제 남은 것은

"정형화된 그 사용자의 패턴에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알아서 제공해 줄 것인가?" 인데..

잠들기 전 따뜻한 말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다.

'오늘 하루 수고했어요. 당신은 잘 살고 있는 겁니다. 굿나잇!'

 

어디선가 유사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을 감수성 충만한 개발자가

언젠가는 나의 이 작은 소망이 반영된 서비스를 런칭해주길 기대한다.

같은 값이면 아리따운 목소리를 가진 여성분이 굿나잇을 해주면 더 좋겠구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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