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3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의 행동에서 나 자신을 볼 때가 많다.
특히 내가 숨기고 싶은 나의 약점들, 내가 고치려고 많이 애썼던 성격들이 희한하게도 내 아이에게서 보인다.
나는 화가 나거나 상대방에게 속상한 일을 당하게 되면 말을 하지 않는다.
바로 그 자리에서 풀 수도 있지만 그냥 입을 닫아버리는 것으로 나름의 불만 표출을 한다.
이러한 패턴이 눈치 빠른 상대방인 경우에는 효과가 있다.
그 상대방이 평소와 다른 나의 모습을 빠르게 인지하고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는 것이
내가 예상하는 모범 답안이었다.
하지만 눈치가 없거나, 눈치는 챘더라도 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을 만난 경우에는
그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고 그러다 보니 답답함까지 더해져 화가 점점 더 커지게 되는, 결국은 조그마한 일로 시작된 일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감정의 골을 파버리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표현방식이 절대적으로 나쁘다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혼자 속앓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나이를 먹어가며,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경험하면서 습득 해왔다.
최근에 초3 아들 녀석이 이런 말을 했다.
학교 단짝 친구가 자신을 섭섭하게 한 일이 있었고, 한 달간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단다.
한달쯤 지나니 그 친구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면서 이제 다시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들은 한 달간 끌어온 찜찜했던 감정이 친구의 사과를 통해 풀려서 굉장히 홀가분해하는 듯했으나,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까 고민을 했다.
아들아..친구에 대한 섭섭함은 얼마가지 않아 수그라들게 되어 있어.
다만 그 뒤부터는 '너 나한테 잘못했으니 사과를 해'. '난 꼭 사과를 받아야겠어' 라는 오기. 자존심 때문에 상대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이지.
그 체벌을 견디다 못해 빠르게 사과를 하면 다행이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벌을 내리고 있는 너나,
그것을 받고 있는 친구나 모두 힘든 시간인 것이고.
그럴바에는 처음에 바로 섭섭한 점을 이야기하고 푸는 것이 맞지 않을까?
가만히 듣고 있던 큰 애,
근데 처음에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조그마한 일이라서, 따지는게 좀 그래.
그런데 그걸 말을 안 하고 넘어가기에는 내가 기분이 나쁘고.
그래서 그냥 말을 안하게 되는 거야.
아차.. 그랬지. 내가 입을 닫아버린 경우도 딱 이거였지.
뭐라고 화를 내기에는 너무 미미한, 하지만 분명 손해 보는 뭔가가 있는 그런 상황.
아이에게 아빠의 시행착오를 통한 인생의 큰 지혜를 주려던 나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아빠한테 큰 삶의 지혜라고 받는 줄 알고 기대했던 아들은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져.